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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1. 개요2. 명칭3. 특징4. 배경
4.1. 사비에트 모델과 제1차 5개년 계획4.2. 북산과의 경쟁4.3. 청소합작과 곡물 외교
5. 전개
5.1. 인민합작사와 공동식당5.2. 공출 체계의 재가동5.3. 부풀려진 목표5.4. 3기작과 해수 벼5.5. 휴경 명령5.6. 마을 제련로5.7. 흑강 물길 돌리기5.8. 미신 타파 운동5.9. 물소 도축5.10. 토착민 강제 하산5.11. 공포정치와 학살
6. 끝없는 식량 징발7. 숨겨진 원흉8. 결과: 삼년대기근
8.1. 사망자 수8.2. 인구와 영양
9. 이후

1. 개요 [편집]

대약진 운동(大躍進運動)은 청평에서 1958년부터 1960년까지 청평 공산당의 주도로 추진된 경제·사회 개발 운동이다. 정식 명칭은 제2차 5개년 계획이다.

당시 청평 지도부는 랜드해협의 국제 질서를 자본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의 체제 경쟁으로 바라보았다. 자본주의 진영의 선두가 루이나, 그 뒤가 플로렌시아라면, 공산주의 진영의 선두는 사비에트였고 청평은 그다음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고 스스로 규정했다. 무엇보다 청평을 자극한 것은 불과 10년 전까지 자신을 식민지로 지배했던 북산이 루이나의 원조를 등에 업고 공업화를 선언했다는 사실이었다. 청평은 단기간에 농업 생산을 비약적으로 늘리고 철강 생산에서 플로렌시아를 추월해, 옛 식민 본국 북산을 확실히 따돌리고 공산권의 제2의 축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운동은 비현실적인 목표와 허위 보고, 강제 동원과 폭력 속에 처참하게 실패했다. 혁명 정부는 식량을 거두기 위해 북산 총독부가 남긴 공출 체계를 그대로 되살렸고, 산악의 토착민 마을을 평야로 강제로 끌어내렸으며, '미신 타파'라는 이름으로 산신 사당과 성림(聖林)을 베어 냈다. 그 결과 1958년 가을부터 1960년까지 청평 전역에 대기근이 닥쳐, 연구자들의 추정으로 약 700만에서 1,1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청평에서는 이 기근을 흔히 '삼년대기근'이라 부른다.

대약진 운동은 이후의 문화대혁명과 함께 오늘날 청평 공산당조차 인정하는 역사적 과오로 꼽힌다. 청평은 공산권의 제2의 중심국가로 도약하기는커녕 수십 년 동안 발전에서 뒤처졌고, 식민지 시기의 공출과 기근을 겪었던 세대에게 혁명 정부 아래에서 되풀이된 기근은 깊은 배신감으로 남았다.

2. 명칭 [편집]

공식 명칭은 제2차 5개년 계획이며, 당은 이를 '농촌이 주체가 된 대약진'이라 선전했다. 오늘날 청평의 공식 역사서와 교과서는 '대약진 운동'과 '삼년대기근'이라는 표현을 쓴다.

민간에서는 다른 이름들이 전해진다. 식량을 거두어 가는 방식이 식민지 시절과 다르지 않았다는 뜻에서 농민들은 이 시기를 '제2 총독부 시대'라 불렀고, 산악의 토착민 공동체에서는 강제 이주를 가리켜 '하산(下山)의 해'라 부른다. 두 표현 모두 청평에서는 공식적으로 쓰이지 않으며, 인터넷에서는 검열 대상이다.

3. 특징 [편집]

대약진 운동은 청평 현대사에서 지도부의 가장 큰 과실로 지목된다. 이후 벌어진 문화대혁명과 함께 청평 사회의 경제적·문화적 발전을 20년 가까이 되돌렸다는 평가를 받으며, 지도자의 무능과 오만이 국가 전체에 얼마나 치명적인 재앙을 부를 수 있는지 보여 주는 사례로 기록된다.

경제성장률의 흐름이 이를 잘 보여 준다. 1953년부터 1957년까지의 제1차 5개년 계획 기간에 청평은 연평균 8~9%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대약진 첫해인 1958년에는 보고상 산업 생산이 크게 늘었으나, 1959년 -11%, 1960년 -24%로 경제가 무너졌다. 1961년 개혁파가 수습에 나서면서 기저효과에 힘입어 두 자릿수 성장으로 돌아섰고 1965년까지 고성장이 이어졌지만, 곧 문화대혁명이 터지면서 1967년과 1968년 두 해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두 차례나 성장의 성과를 송두리째 잃은 탓에 청평은 이웃 나라들과의 격차를 좁히지 못했다. 195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유고랜드와 청평의 1인당 소득은 큰 차이가 없었으나, 1970년대 말 청평의 1인당 소득은 200달러에도 못 미친 반면 유고랜드는 그 열 배를 웃돌았다. 인구가 청평의 수십 분의 일에 불과한 유고랜드가 1990년대에는 청평 경제 규모의 절반을 넘보는 수준에 이르렀다. 옛 식민 본국 북산과의 1인당 소득 격차도 이 시기에 크게 벌어졌다.

물론 청평 체제 아래에서도 일정한 복지는 존재했다. 도시 노동자는 국가가 배분한 집에서 살며 평생직장과 무상 의료를 보장받았고, 이 때문에 실질적인 구매력은 달러 환산 수치보다 다소 높았다. 그러나 북산과 유고랜드의 도시에 텔레비전과 가전제품이 보급될 무렵에도 청평의 농촌 마을 상당수에는 전기와 상수도가 들어오지 않았고, 자가용이라 해 봐야 자전거가 고작이었다.

운동의 기원에는 북산과의 경쟁이 있었다. 북산이 하쿠센 조약으로 루이나의 원조를 확보하고 공업육성 5개년 계획을 발표하자, 청평 지도부는 강한 자극을 받았다. 한 세기 가까이 청평의 제후국이었다가 20년 동안 식민 본국 노릇을 한 북산이 다시 앞서 나가는 모습은, 혁명 정부에게 단순한 경제 경쟁이 아니라 민족적 굴욕의 재현으로 받아들여졌다.

청평 공산당은 이 운동을 '농촌이 주체가 된 최초의 혁명'이라 규정했다. 도시 노동자가 주도하는 사비에트식 공업화 대신 농민이 마을마다 제련로를 쌓아 철을 만들고, 논에서 세 번 벼를 거두며, 산과 강을 스스로의 손으로 고치자는 것이었다. 지도부는 이를 '청평의 길'이라 불렀지만, 산업화에 필요한 도시 인구와 체계적인 생산 시설을 외면한 공상에 불과했다.

일부 경제 관료와 군 원로는 계획의 위험을 경고했다. 그러나 최고 지도부는 반대자들에게 자아비판을 강요하고 숙청을 단행했다. 제1차 5개년 계획의 성공은 오히려 지도부가 자신의 무오류성을 맹신하게 만드는 독이 되었고, 권력 내부의 견제는 완전히 무너졌다. 지도부는 경제와 사회가 붕괴하는 현실을 보고받으면서도 계획을 고집했고, 1960년 자연재해까지 겹쳐 수백만 명이 굶어 죽은 뒤에야 식량을 수입하고 정책을 수정했다.

오늘날 청평의 영화나 소설이 검열을 피해 현재 체제를 에둘러 비판할 때, 대약진기는 가장 자주 빌려 오는 소재다. 특히 식민지의 공출과 혁명의 징발을 한 장면에 겹쳐 보여 주는 수법은 청평 비판 문학의 오래된 관용구가 되었다.

4. 배경 [편집]

"플로렌시아는 한 해에 강철 2천만 톤을 만든다. 15년 뒤에는 3천만 톤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될 것인가? 올해 우리는 120만 톤을 만들었다. 5년 뒤에는 5백만 톤, 10년 뒤에는 1천5백만 톤, 15년 뒤에는 3천만 톤을 넘길 것이다. 누군가는 허풍이라 하겠지만, 이것은 인민의 힘을 믿는 자신감이다. 우리를 20년 동안 짓밟았던 북산이 남의 나라 돈으로 5년 안에 빌베른을 따라잡겠다고 떠드는데, 제 손으로 혁명을 해낸 우리가 못할 까닭이 무엇인가! 15년 안에 우리는 플로렌시아를 넘어설 것이다.[1]"

1958년 1월 대약진 운동을 선포하는 려우 즈카이의 연설

4.1. 사비에트 모델과 제1차 5개년 계획 [편집]

1949년 독립 이후 청평은 사비에트를 본보기로 국가 운영을 설계했다. 지도부는 "사비에트가 짧은 기간에 농업국에서 공업국으로 바뀌었듯 우리도 그 길을 따른다"는 구호를 걸고 원조를 요청했고, 실제로 많은 설비와 기술자가 사비에트에서 들어와 청평 공업화의 기초를 놓았다.

1950년대 초 청평은 연 20% 성장을 목표로 사비에트에 500개가 넘는 공장 건설을 요구했다. 그러나 사비에트 지도자 노스탈린은 이를 비현실적이라 보고 규모를 절반 이하로 줄여 승인했다. 청평 지도부는 불만을 품었지만 노스탈린의 권위 앞에서 공개적으로 반발하지 못했다. 대신 경제 관료들은 균형 재정과 물가 안정을 중시하는 현실적인 정책을 폈고, 1953년부터 1957년까지의 제1차 5개년 계획은 연평균 8~9% 성장이라는 나쁘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

노스탈린이 1950년대 중반 사망하고 니키타 인터루쇼프가 권력을 잡자, 청평 지도부는 사비에트에 대한 심리적 부담에서 벗어났다. 동시에 사비에트가 여전히 압도적인 대국으로 군림하는 가운데 청평이 '2등 국가'로 고착될 수 있다는 초조함이 커졌다.

4.2. 북산과의 경쟁 [편집]

결정적인 자극은 북쪽에서 왔다. 1957년 북산은 루이나와 하쿠센 조약을 맺어 대규모 원조와 군사 보호를 확보했고, 이를 바탕으로 공업 육성 계획을 내세우며 "5년 안에 빌베른을 따라잡는다"고 선전했다. 불과 8년 전 청평에서 쫓겨난 옛 식민 본국이 다시 공업국을 자처하는 모습은 청평 지도부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려우 즈카이는 당 회의에서 "북산은 남의 돈으로 공장을 짓지만, 우리는 인민의 손으로 짓는다"며 북산보다 빠른 속도를 요구했다.

지도부는 "7년 안에 플로렌시아를, 15년 안에 루이나를 따라잡는다"는 구호를 내걸었다. 안정 성장을 주장하던 경제 관료들은 '우경 보수주의자'라는 낙인이 찍혀 자아비판을 강요당했다. 당시 플로렌시아는 전후 배급제를 막 끝낸 처지였고, 청평은 이를 추월의 기회로 착각했다. 철강 생산 목표는 5년 뒤 5백만 톤, 10년 뒤 1천5백만 톤, 15년 뒤 3천만 톤으로 정해졌는데, 1957년 청평의 실제 철강 생산은 120만 톤이었다.

4.3. 청소합작과 곡물 외교 [편집]

북산을 견제하려는 조급함은 군비로도 이어졌다. 청평은 사비에트에서 소총부터 최신 전투기까지 대량으로 사들였고, 1956년 청소합작 협정[2]으로 탄도미사일과 핵 기술을 이전받기로 약속받았다. 그러나 청평에는 대금으로 치를 외화가 부족했고, 내놓을 수 있는 것은 곡물과 육류뿐이었다. 식량 자급에 어려움을 겪던 사비에트는 곡물로 대금을 받는 조건에 동의했다.

핵 개발에 필요한 설비와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청평 지도부는 전국에서 곡물을 거두어 수출했다. 1959년 한 해에만 약 280만 톤의 곡물이 사비에트와 우방국으로 실려 나갔다. 수도 띠에우리엔과 바잉하오, 남창 같은 대도시에서는 1960년 한 해 동안 수백만 명이 배급을 제대로 받지 못했고, 한 달 고기 배급이 1인당 100g에 그쳐 영양실조와 부종에 걸리는 사람이 속출했다. 부종 환자는 병원 진단서를 떼어야만 콩과 흑설탕을 소량 배급받을 수 있었다. 지도부는 1958년 가을부터 식량 부족을 보고받고 있었으나 "희생은 필연적"이라는 구호 아래 수출을 멈추지 않았다.

5. 전개 [편집]

대약진 운동은 크게 농업 집단화와 식량 징발, 마을 제련로 운동, 대규모 치수 사업, 미신 타파 운동으로 나뉜다. 여기에 산악 토착민의 강제 이주와 가축 도축, 엉터리 농법이 겹치면서 농촌의 생산 기반 전체가 한꺼번에 무너졌다. 기업소마다 목표 달성을 위해 야간 근무가 강요되어 노동 시간은 하루 10시간, 주 60시간을 넘기 일쑤였다.

현실적인 방법을 제안한 경제 관료와 기술자들은 '부르주아 전문가'로 몰려 입을 다물어야 했다. 지도부는 "책을 읽은 자보다 흙을 만진 자가 더 많이 안다"는 구호로 전문가 집단을 무력화했다. 정작 려우 즈카이 자신은 독서와 웅변으로 당내 최고의 설득력을 자랑하던 지식인이었다는 점에서, 이 반지성주의는 모순적이었다.

5.1. 인민합작사와 공동식당 [편집]

혁명 직후 청평은 토지 개혁을 단행해 지주와 식민 협력자의 토지를 몰수했다. 이 과정에서 '반혁명 분자'로 낙인찍힌 이들이 처형되거나 투옥되었고, 일부 지역에서는 수확이 많았다는 이유만으로 중농까지 공격 대상이 되었다. 농촌의 전통적인 생산·분배 구조와 가내 부업은 이때 이미 크게 흔들렸다.

1958년 지도부는 사비에트식 집단화를 넘어서겠다며 전국의 농촌을 인민합작사로 묶었다. 농민은 더 이상 자기 땅의 주인이 아니라 합작사의 부속품이 되었다. 인구 이동은 법으로 금지되었고, 집에 곡식을 저장하는 것은 '반동적 저항'으로 규정되었다. 간부들은 가정집을 뒤져 곡물과 소금은 물론 솥과 그릇, 수저까지 거두어 갔고, 개인 취사는 전면 금지되었다. 사원과 시장, 식당은 문을 닫았고 그 자리를 합작사의 공동식당이 대신했다.

공동식당의 배급은 평등하지 않았다. 충성도가 높은 이에게 먼저 식량이 돌아갔고, '반동'으로 찍힌 이들은 묽은 죽 물만 받았다. 성과를 낼수록 더 많이 거두어 가는 구조 속에서 농민의 생산 의욕은 곤두박질쳤다. 사회주의적 평등을 내세운 집단화는 실제로는 굶주림을 평등하게 나누는 체제였고, 공동식당은 기아와 병이 퍼지는 또 다른 무덤이 되었다.

5.2. 공출 체계의 재가동 [편집]

청평의 대약진을 다른 공산국가의 집단화와 가장 뚜렷하게 구별하는 것은, 혁명 정부가 식량을 거두기 위해 북산 총독부의 공출 체계를 거의 그대로 되살렸다는 점이다.

1949년 혁명 정부는 총독부가 1930년대에 작성한 토지 대장과 수확량 조사표, 마을별 공출 할당 장부를 대부분 온전히 넘겨받았다. 1950년대 초에는 이 자료가 토지 개혁의 근거로 쓰였으나, 1958년 곡물 징발 목표가 급격히 늘자 식량부는 식민지기의 공출 할당 방식을 그대로 부활시켰다. 마을마다 수확 예상량을 정해 일정 비율을 선납하게 하고, 미달하면 마을 책임자를 처벌하는 방식이었다. 공출 창고와 수송 경로, 심지어 일부 지역의 공출 담당 하급 관리까지 식민지 시절의 것이 그대로 쓰였다.

농민들은 곧 이를 알아보았다. 1944~1945년 북부 대기근을 겪은 세대에게 트럭에 실려 나가는 곡물과 텅 빈 창고는 불과 15년 전의 풍경과 똑같았다. 북부 평야의 농촌에서는 "총독부가 붉은 깃발을 달고 돌아왔다"는 말이 돌았고, 이 시기를 가리키는 '제2 총독부 시대'라는 표현이 생겨났다. 당은 이런 말을 퍼뜨린 사람들을 반혁명 선동죄로 처벌했다.

역설은 수치에서도 드러난다. 1930년대 후반 총독부는 북부 평야 쌀 생산의 3분의 1 이상을 반출했는데, 1959년 청평 정부가 지시한 징발 비율 역시 수확량의 3분의 1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총독부는 실제 수확량을 기준으로 거두었지만 혁명 정부는 부풀려진 보고 수확량을 기준으로 거두었다는 것이다.

5.3. 부풀려진 목표 [편집]

대약진 운동은 애초부터 현실과 동떨어진 숫자놀음이었다. 지도부가 달성 불가능한 목표를 내려보내면 지방 간부들은 상부의 환심을 사기 위해 더 부풀린 수치를 보고했고, 숫자는 곧 충성심의 지표가 되었다. 처음에는 1헥타르당 벼 몇 톤 수준의 목표가 제시되었으나, 경쟁적인 허위 보고 끝에 일부 지역은 1헥타르당 20~30톤을 약속했다. 오늘날 루이나의 기계화된 대규모 농장조차 벼 수확량이 1헥타르당 7~8톤 안팎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삽과 괭이에 의존하던 1950년대 청평 농민에게 서너 배를 요구한 셈이다.

각지의 '모범 논'은 극히 좁은 실험 농지에 다른 논의 벼를 옮겨 심어 성과를 꾸민 것에 불과했으나, 곧 전국적인 기준으로 둔갑했다. 비료 쟁탈전도 광기를 띠었다. 해초와 쓰레기, 굴뚝의 재와 검댕까지 긁어모아 논에 뿌렸고, 흙벽돌로 지은 집은 '양분의 보고'라 불리며 허물어졌다. 처음에는 빈 담장과 외양간이 허물어졌지만, 목표 달성이 급해지자 사람이 살던 집까지 헐려 흙이 논에 뿌려졌다.

5.4. 3기작과 해수 벼 [편집]

청평식 엉터리 농법의 상징은 3기작이었다. 청평 남부는 원래 2기작이 가능한 지역이었는데, 지도부는 "한 해에 세 번 거두면 곡물이 1.5배가 된다"며 전국에 3기작을 강제했다. 북부처럼 기후상 2기작도 어려운 지역까지 예외가 없었다. 모내기와 수확 사이의 간격이 줄자 벼는 제대로 여물지 못했고, 쉴 틈 없이 물을 대느라 저수지가 말랐으며, 지력은 몇 해 만에 고갈되었다. 세 번째 벼는 대부분 쭉정이였고, 그 사이 두 번째 벼의 수확 시기마저 놓치는 일이 잦았다.

더 황당한 것은 해수 벼 실험이었다. 사비에트 유학을 다녀온 식물학자 레 꽁 반(黎功萬)은 당시 사비에트에서 유행하던 '환경 적응' 학설을 끌어와, 벼를 바닷물에 조금씩 길들이면 짠물에서도 자라는 품종으로 바뀐다고 주장했다. 지도부는 이를 '바다를 곡창으로 바꾸는 혁명적 발견'이라 치켜세웠고, 해남성 연안의 논에 방조제를 터 바닷물을 끌어들이게 했다. 결과는 수만 헥타르의 논이 소금에 절어 버린 것이었다. 염해를 입은 논은 이후 10년 넘게 벼를 심을 수 없었다.

5.5. 휴경 명령 [편집]

3기작보다 더 큰 재앙은 '덜 재배하라'는 명령이었다. 1958년 가을 보고상 풍작에 고무된 려우 즈카이는 "농촌은 오히려 곡식의 무게에 눌려 허덕이고 있다"며 농지의 3분의 1을 쉬게 하라고 지시했다. 남은 농지에 인력과 비료를 집중하면 수확이 더 늘어난다는 논리였다.

현실은 정반대였다. 제련로와 치수 공사에 인력이 빠져나가고 농민이 도시로 몰리면서 실제 경작 면적은 급감했다. 북령성의 곡물 경작 면적은 1958년 약 290만 헥타르에서 1960년 250만 헥타르로 15% 가까이 줄었고, 화운성에서는 해마다 3만 헥타르 이상의 농지가 방치되었다. 남창성 일부 지역에서는 농지의 절반만 실제로 경작되었다. 농업부장 도 반 끼엔(杜文堅)은 1960년 초 내부 회의에서 전국의 휴경지가 400만 헥타르를 넘는다고 보고했다.

결국 농민들은 농지의 3분의 1을 놀리고, 나머지에는 3기작을 강요받으며, 정작 돌볼 시간은 제련로와 공사장에 빼앗겼다. 북령성의 농민들은 "벼는 논에서 썩고 우리는 쇳덩이만 쌓는다"고 탄식했다.

5.6. 마을 제련로 [편집]

"이 작은 화덕들로 이만큼 쇠를 만드는데, 북산 놈들은 뭐하러 그 큰 제철소를 지었단 말인가?"

1958년 가을, 마을 제련로의 생산 보고를 받은 한 당 간부의 말[3]

대약진을 상징하는 풍경 가운데 하나는 전국의 마을마다 세워진 작은 제련로였다. 지도부는 "집집마다 화덕을 세우면 큰 제철소 없이도 강철 생산을 늘릴 수 있다"고 장담했다. 청평의 제련로 운동에는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특징이 하나 있었다. 식민지 시기 북산이 깔아 놓은 철도 지선과 광산 설비, 총독부 건물의 철문과 난간을 뜯어 제련로에 넣는 것이 애국 행위로 장려되었다는 점이다.

당은 이를 '식민의 재를 혁명의 강철로'라는 구호로 포장했다. 북부 평야에서는 식민지기에 쌀을 실어 나르던 철도 지선 수백 킬로미터의 레일이 뜯겨 나갔고, 북산 기업이 남기고 간 광산의 권양기와 선로도 해체되었다. 식민 지배의 상징을 녹여 없앤다는 구호는 농민들의 호응을 얻었지만, 그 결과 곡물과 광석을 실어 나를 수송망이 스스로 끊겼다. 1960년 기근이 번지는 동안 구호 식량을 오지로 보낼 철도가 없었다는 사실은 이 운동의 가장 뼈아픈 역설로 꼽힌다.

제련로에서 나온 것은 강철이라 부르기 어려운 조악한 금속 덩어리였다. 농민들은 이를 '똥쇠'라 불렀다. 불순물이 빠지지 않은 이 쇳덩이로 만든 농기구는 얼마 못 가 부러졌고, 다시 제련할 시설과 연료도 없었다. 제철은 전문 기술이 필요한 일이었지만, 평생 농사만 지은 농민 수천만 명이 흙벽돌 화덕 앞에서 풀무질에 동원되었다. 멀쩡한 농기구와 솥, 심지어 비싸게 들여온 사비에트제 트랙터까지 화덕으로 들어가 똥쇠가 되는 기괴한 풍경이 전국에서 벌어졌다.

5.7. 흑강 물길 돌리기 [편집]

대약진기의 대형 치수 사업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흑강 물길 돌리기다. 흑강은 1409년 려우 다이가 몽골 기병대를 무찌른 북부의 강으로, 청평 건국 서사의 상징적인 장소였다. 지도부는 늘 범람하던 흑강의 물길을 산맥 너머 가뭄이 잦은 서부 고원으로 돌려, "려우 다이가 몽골을 물리친 강에서 인민이 자연을 물리친다"는 구호를 내걸었다.

1958년 겨울부터 약 200만 명의 농민이 공사에 동원되었다. 설계는 제대로 된 지질 조사 없이 이루어졌고, 굴착기 대신 삽과 광주리가 쓰였다. 하류의 논에 댈 물이 끊길 것이라는 수리 기술자들의 경고는 무시되었다. 공사 중 사고와 과로, 굶주림으로 숨진 노동자만 수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같은 시기 전국에서는 수천 개의 작은 저수지와 흙댐이 급조되었다. 대부분 배수로와 여수로 없이 흙을 쌓아 올린 것이었다. 1960년 여름 북부에 폭우가 쏟아지자 흑강 상류의 흙댐들이 연쇄적으로 무너졌고, 하류의 마을과 논이 한꺼번에 쓸려 나갔다. 이 홍수로 수만 명이 숨지고 북부 곡창 지대의 가을 수확이 사실상 사라졌다. 흑강 물길 돌리기는 이듬해 중단되었고, 반쯤 파다 만 수로는 지금도 서부 고원에 흔적으로 남아 있다.

5.8. 미신 타파 운동 [편집]

"산신은 인민을 먹여 살린 적이 없다. 성스러운 숲이란 지주가 인민을 겁주려고 지어낸 이야기일 뿐이다."

1958년 미신 타파 운동 당시 당 선전 포스터의 문구

대약진과 함께 전국적으로 '미신 타파 운동'이 벌어졌다. 표적은 토착 신앙의 산신 사당과, 마을마다 신성시하며 베지 않던 성림(聖林)이었다. 당은 이를 봉건 미신과 지주 지배의 잔재로 규정하고, 사당을 헐어 제련로의 벽돌로 쓰고 성림을 베어 연료로 태우게 했다. 녹기의 난 때부터 토착민 저항의 상징이던 산신 신앙은 혁명 정부에게 늘 불편한 존재였다.

성림은 단순한 신앙의 대상이 아니었다. 대부분 수원지와 산비탈, 마을 뒷산에 자리한 성림은 오랫동안 물길을 붙잡고 산사태를 막는 역할을 해 왔다. 제련로의 연료 수요까지 겹치면서 숲은 몇 달 만에 민둥산으로 바뀌었다. 북부 일부 현에서는 방풍림의 70% 이상이 사라졌고, 남부 산악에서도 숲의 절반 가까이가 베어졌다. 1960년 흑강 유역의 홍수 피해가 그토록 컸던 이유 가운데 하나가 상류 성림의 소멸이었다는 것이 오늘날의 통설이다.

숲이 사라지자 참새와 박쥐 같은 천적도 줄었고, 1959년부터 메뚜기와 멸구가 들끓었다. 방제에 쓸 농약은 이미 동물을 잡는 데 허비된 뒤였다. 굶주린 합작사들은 오리와 물고기를 잡으려고 논과 저수지에 독한 살충제를 풀었고, 그렇게 잡은 오리를 먹은 도시 주민들이 중독되어 숨지는 일도 있었다. 1960년 북부 평야 논의 절반 이상이 충해를 입은 것으로 추정된다.

5.9. 물소 도축 [편집]

청평 농업의 기둥은 논을 가는 물소였다. 지도부는 대약진이 끝나면 모든 합작사에 트랙터가 보급될 것이라며, 물소를 '낡은 농업의 상징'으로 규정하고 육류 수출과 도시 배급을 위해 대량으로 도축하게 했다. 청소합작의 대금을 육류로 갚아야 했던 사정도 도축을 부추겼다. 화운성 당서기 브엉 꽝 민(王光明)은 "물소가 사라지는 날이 기계화가 완성되는 날"이라고 연설했다.

약속된 트랙터는 오지 않았다. 1958년부터 1960년까지 전국 물소의 3분의 1 가까이가 도축되었고, 병과 굶주림으로 폐사한 가축도 많았다. 남은 물소마저 사료가 없어 힘을 쓰지 못했다. 1960년 봄 많은 마을에서 사람이 직접 쟁기를 끌어야 했고, 쟁기질을 제때 못 한 논은 모내기를 놓쳤다. 물소는 농민의 노동력이자 유일한 저축이었기 때문에, 물소를 잃은 가구는 기근이 끝난 뒤에도 오랫동안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돼지 콜레라와 구제역이 퍼졌지만 간부들은 보고를 꺼렸고, 가축 폐사는 농민의 단백질 공급원이 사라졌다는 것을 뜻했다.

5.10. 토착민 강제 하산 [편집]

대약진은 산악의 토착민 공동체에 가장 가혹했다. 1958년 지도부는 산악 마을을 '분산되고 낙후된 생산 단위'로 규정하고, 이들을 평야의 인민합작사로 옮겨 집단 노동에 참여시키는 '하산 정책'을 시행했다. 명분은 산악 주민을 문명과 사회주의로 이끈다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제련로와 치수 공사에 쓸 노동력을 확보하고 산악의 숲과 광산을 국가가 장악하려는 조치였다.

약 80만 명의 토착민이 수백 년을 살아온 산을 떠나 평야로 끌려 내려왔다. 이들은 합작사에서 가장 낮은 등급의 노동자로 분류되었고, 벼농사를 해 본 적 없다는 이유로 공동식당의 배급에서도 뒤로 밀렸다. 한족 계열 간부들은 이들의 언어와 신앙을 미신 타파의 대상으로 삼았다. 평야의 풍토병과 굶주림이 겹치면서 강제 이주된 토착민의 사망률은 전국 평균의 두세 배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오늘날 토착민 단체와 일부 연구자들은 하산 정책을 특정 민족 집단을 겨냥한 학살로 규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청평 정부는 이를 '경제 정책의 과오' 가운데 하나로만 인정하며, 민족 문제로 다루는 것 자체를 분열 책동으로 규정하고 있다. 몽골 시대 이래 이어져 온 토착민과 한족 계열 주민 사이의 긴장은 이 논쟁 속에서 지금도 되풀이되고 있다.

5.11. 공포정치와 학살 [편집]

징발 목표를 채우지 못한 마을에서는 폭력이 일상이 되었다. 곡식을 숨겼다고 의심받은 농민은 공개 투쟁 대회에서 구타당했고, 할당량을 채우지 못한 마을의 책임자는 '우경 분자'로 몰려 끌려갔다. 가장 흔한 처벌은 식량을 주지 않는 것이었다. 굶주림은 구타보다 먼저 동원되는 처벌 수단이었고, 일부 지역의 조사에서는 굶어 죽은 사람 상당수가 처벌로 배급을 끊긴 경우였다.

일하지 못하는 노인과 병자, 배가 고파 곡식을 훔친 사람과 그 가족은 '반동'으로 몰려 지역 간부와 민병대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맞아 죽고, 총살되고, 산 채로 묻힌 사람의 수는 기록마다 크게 다르나, 연구자들은 대기근 사망자 가운데 수십만 명이 굶주림이 아니라 직접적인 폭력으로 숨졌다고 본다. 1959년 여름 공출에 저항해 관청을 습격한 화운성 산간 마을 몇 곳은 군이 투입되어 초토화되었다. 이 사건은 오랫동안 '반혁명 폭동 진압'으로만 기록되었다.

당 중앙에서도 숙청이 이어졌다. 1959년 여름 당 회의에서 독립 전쟁 당시 혁명군 총사령관이던 국방부장 호앙 딘 끄엉(黃廷強)이 려우 즈카이에게 "굶주린 인민 앞에서 주석도 책임을 져야 한다"고 직언했다. 그는 곧바로 해임되어 '반당 분자'로 낙인찍혔고, 이후 당 안에서 대약진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목소리는 사라졌다. 호앙 딘 끄엉은 문화대혁명 때 다시 박해를 받아 1968년 숨졌고, 1978년 정돈 회의 이후에야 복권되었다.

6. 끝없는 식량 징발 [편집]

"먹을 것이 모자라면 끼니를 줄이면 된다. 흉년에 사람이 죽는 것은 옛날에도 있던 일이다."

1959년 봄, 각지의 기근 보고를 받은 려우 즈카이의 말로 전해지는 발언
"우리 인민은 원래 풀을 먹고도 산다."

1960년 델라웨어 기자 에리히 발트와의 인터뷰에서 려우 즈카이가 한 말

1959년 청평의 곡물 생산은 여러 실책과 자연재해가 겹쳐 크게 줄었다. 그러나 청평은 사비에트에 "상환을 늦춰 달라"고 말하지 못했다. 려우 즈카이 특유의 자존심 때문이기도 했고, 체제 경쟁의 한가운데서 자국의 기아가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려우는 전국 수확량의 3분의 1을 징발하라는 구체적인 수치까지 지시했다.

징발된 곡물의 우선순위는 수출과 수도 띠에우리엔, 대도시, 북부 공업 지대의 순이었고, 농촌의 필요는 철저히 뒤로 밀렸다. 1960년에는 '수출 제일' 방침이 채택될 정도였다. 지도부는 대약진의 성공을 선전하기 위해 우방국에 곡물을 무상으로 보내고, 외국 대표단을 초청해 성대한 연회를 열었다. 플로렌시아 좌파 정치인 대표단과 델라웨어 대표단은 풍성한 식탁과 가득 찬 창고를 보고 돌아갔지만, 그 창고의 문은 굶주린 농민을 위해 열리지 않았다. 당시 띠에우리엔에 주재한 동사랜드 외교관 도안 반 푹은 훗날 "청평 사람들은 우리가 부탁하는 것은 무엇이든 내주었다. 나는 그들이 굶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부끄러웠다"고 회고했다.
식량은 무기였다. 굶주림은 몽둥이보다 먼저 쓰이는 처벌이었다. 공동식당에서 죽을 푸는 국자는 사람의 얼굴을 읽었다. 당에 충실한 노동자에게는 솥 바닥까지 국자가 내려갔고, 반동으로 찍힌 이에게는 표면의 멀건 물만 떠 주었다. 한 농민은 그 죽이 "푸르스름해서 도저히 먹을 수 없는 것이었다"고 기억했다.

앙투안 르베르, 《굶주린 제국: 청평 대기근 1958~1960》(2010)

1960년에 접어들자 상황은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사비에트는 청평이 곡물 대금을 제때 갚지 못하자 경제적 부담을 이유로 1959년부터 원조를 줄였고, 1960년에는 기술자 대부분을 철수시켰다. 청소합작으로 약속된 핵과 미사일 기술은 끝내 이전되지 않았다. 대약진을 둘러싼 노선 갈등과 려우의 공개적인 조롱, "핵전쟁이 나도 청평 인민은 살아남아 새 세상을 세운다"는 그의 발언은 사비에트 지도부의 경계심을 키워 결별을 굳혔다. 그해 말 사비에트가 채무 상환 유예와 곡물 대여를 제안했을 때에도 려우는 "사비에트에 빚을 지고 싶지 않다"며 거절했다.

1960년 가을이 되어서야 청평 정부는 곡물 수입을 승인했다. 플로렌시아와 델라웨어에서 곡물이 들어왔고, 국교가 없는 루이나산 곡물도 제3국 상사를 거쳐 수입되었다. 1960년 말부터 이듬해까지 들여온 곡물은 약 160만 톤으로, 1959년 청평이 해외로 내보낸 곡물의 절반을 조금 넘는 양이었다. 공동식당 같은 정책도 이 무렵 일부 폐기되었다. 일부 논자들은 기근 보고를 받고도 징발을 늘린 려우의 고집을 들어 대약진을 '정책 실패'가 아니라 학살로 분류하기도 한다.

7. 숨겨진 원흉 [편집]

대약진의 책임은 오랫동안 려우 즈카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 왔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일부 공개된 당 문서는 징발의 실무를 밀어붙인 인물로 총리 팜 반 롱(范文龍)을 지목한다.

팜 반 롱은 1954년 려우가 당 주석직에 전념하면서 총리에 오른 이래 12년 동안 행정부를 이끌었다. 그는 농촌에서 곡물을 거두어 도시를 먹이고 사비에트에 대금을 갚아야 할 책임을 진 인물이었다. 공개된 전보들에 따르면 그는 1959년과 1960년 내내 지방 간부들에게 직접 전화를 걸거나 전보를 보내 징발 목표를 독촉했고, 화운성과 남령성에서 대규모 아사가 보고된 뒤에도 할당량을 줄이지 않았다. 식민지기의 공출 장부를 되살려 쓰라는 식량부의 방안을 최종 승인한 것도 총리실이었다.

려우 즈카이가 보고된 풍작을 믿고 대약진이 인민을 잘살게 할 것이라 확신했다면, 팜 반 롱은 실제 수확량을 알고 있었다는 점에서 더 무거운 책임이 있다는 것이 비판론의 요지다. 그는 1960년 말 한 내부 회의에서 "농촌이 굶는 것은 슬픈 일이지만, 도시가 굶으면 혁명이 끝난다"고 말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럼에도 팜 반 롱은 책임을 피했다. 1962년 당대회에서 려우가 자아비판을 할 때 그는 침묵했고, 문화대혁명 때는 려우 편에 서서 총리직을 내놓는 대신 신변을 지켰다. 1978년 정돈 회의는 대약진을 '려우 노선의 과오'로 규정했는데, 이 결론은 모든 책임을 이미 세상을 떠난 려우에게 돌림으로써 팜 반 롱을 비롯한 당시 실무 책임자들을 사실상 면책했다. 그는 1984년 혁명 원로의 예우 속에 사망했다. 그의 역할이 공개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한 것은 사망 이후, 그것도 해외에서 출간된 연구를 통해서였다.

8. 결과: 삼년대기근 [편집]

"내년에는 동지도 우리처럼 굶게 될 것이오."

1960년 봄, 시찰 온 중앙 간부에게 한 농민이 한 말
"그때는 국수 한 줌이 남아 있으면 그걸 내일로 미뤘어요. 간부가 와서 같이 먹자고 했더니, 자기는 소금물이면 된다고 하더군요. 간부가 그 정도였으니 우리야 말할 것도 없었지요."

한 청평 노인이 루이나 다큐멘터리 제작진에게 남긴 회고

1960년 여름에는 흑강 유역의 홍수와 남부의 가뭄이 잇따랐다. 이는 단순한 불운이 아니었다. 성림과 산림이 사라지고 급조된 흙댐이 무너지면서 물길의 순환 자체가 망가진 결과였다. 인민이 앉아서 죽기만 한 것은 아니다. 농민들은 띠에우리엔으로 몰려가 진정서를 냈고, 중앙 조사단에게 몰래 편지를 건넸으며, 일부는 무기를 들고 간부를 죽이거나 식량 창고를 습격했다. 그러나 대부분 조직되지 않은 민란 수준에 그쳐 쉽게 진압되었다. 역사학자 앙투안 르베르는 "당시 청평 농민에게는 저항할 생물학적 여력 자체가 남아 있지 않았다"고 평가한다.

8.1. 사망자 수 [편집]

대약진이 부른 대기근은 1958년 가을부터 1960년 말까지 이어졌고, 청평에서는 이를 삼년대기근이라 부른다. 사망자 수는 지금도 확정되지 않았다.

청평 정부의 공식 입장은 1981년 발표된 '비정상 사망 약 380만 명'이다. 이는 1958년부터 1960년까지 줄어든 인구를 단순 합산한 수치로, 같은 기간 출생아가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실제 초과 사망은 이보다 훨씬 많다. 1980년대 플로렌시아 인구학자 루카 페라리가 인구 조사 자료를 재분석해 약 700만 명이라는 추정을 내놓았고, 청평 기자 출신 연구자 쩐 반 뚜언은 해외에서 출간한 《이름 없는 묘비》(2008)에서 지방 문서를 근거로 약 900만 명을 제시했다. 앙투안 르베르는 폭력에 의한 사망까지 포함해 1,100만 명설을 주장한다. 1979년 정돈 회의 준비 과정에서 당 내부 조사단이 집계한 수치가 900만~1,000만 명이었다는 증언도 있으나, 문서는 공개되지 않았다.

당시 청평 인구가 약 1억 6천만 명이었음을 생각하면, 인구의 약 4.5~7%가 불과 2년 남짓 사이에 목숨을 잃은 셈이다. 이는 청평이 겪은 어떤 전쟁보다도 큰 인명 피해다. 1944~1945년 식민지기 북부 대기근의 사망자가 100만 명 안팎으로 추정되는 것과 비교하면, 혁명 정부 아래의 기근은 그보다 일곱 배 이상 큰 재앙이었다. 오늘날 청평의 어용 학자들은 "수백만 명설은 과장이며 실제로는 200만~300만 명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피해는 지역과 집단에 따라 크게 달랐다. 가장 심각했던 곳은 남령성으로 인구의 15% 가까이가 숨졌고, 화운성도 10%를 넘었다. 강제 하산된 산악 토착민의 사망률은 전국 평균의 두세 배에 이르렀다. 반면 대도시와 북부 해안 공업 지대는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었고, 남창성처럼 지방 지도부가 대약진 지시를 슬그머니 따르지 않아 피해를 줄인 곳도 있었다. 2013년 공개된 청평 정부의 일부 문건에 따르면 남령성과 해남성에서는 1960년 한 해에만 수백 건의 식인 사건이 조사되었다.

8.2. 인구와 영양 [편집]

청평의 인구는 1949년 약 1억 3천만 명에서 1958년 약 1억 5,800만 명으로 늘었다가, 대기근을 거치며 1961년 약 1억 5,300만 명으로 줄었다. 1957년 약 620만 명이던 출생아 수는 1960년 약 370만 명까지 떨어졌다. 혁명 직후 제정된 피임·낙태 금지법과 "인구는 곧 국력"이라는 려우의 방침 아래 출산율이 높았는데도 인구가 줄었다는 것은, 수치 이상의 초과 사망이 있었음을 뜻한다.

기근이 끝난 1962년부터는 보상 출산으로 해마다 700만 명이 넘는 아이가 태어나는 출산 붐이 일었다. 이 세대가 노동 시장에 나온 1970년대 후반 일자리와 식량 부족이 문제가 되자, 1978년 정돈 회의 이후 정부는 두 자녀 정책을 도입했다. 청평의 인구는 1975년 약 2억 1천만 명, 2020년대 약 3억 명으로 늘었으나, 1990년대부터 저출산 국가가 되어 오늘날 합계출산율은 1.6명 안팎이다.

국제 기구의 추정에 따르면 청평의 1인당 하루 열량 섭취량은 1957년 약 2,050kcal에서 1960년 약 1,480kcal로 떨어졌다. 대다수 농민이 사실상 하루 한 끼로 버틴 셈이다. 열량 섭취는 1965년 약 1,850kcal로 회복되었고, 1978년 개혁 이후에야 2,000kcal를 넘었다. 청평 노인들 사이에서는 "차라리 황조 시절이 더 먹고살 만했다"는 말이 오갔는데, 이는 대약진 이후 20년 가까이 식량 사정이 식민지 이전 수준을 넘지 못했다는 통계와 크게 다르지 않다.

농촌의 중년층 이상은 이 참상을 비교적 담담하게 견뎠다고 한다. 식민 지배와 대기근, 독립 전쟁을 모두 겪은 이들에게 기근은 처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을 가장 크게 무너뜨린 것은 굶주림 자체보다, 굶주림을 준 것이 이번에는 외세가 아니라 자신들이 세운 혁명 정부였다는 사실이었다.

9. 이후 [편집]

대기근으로 대약진 운동은 1960년 말 사실상 철회되었고, 청평 공산당 내부는 분열하기 시작했다. 수습을 맡은 것은 부총리 쩐 득 하이(陳德海)였다. 그는 농가의 자율 경작을 부분적으로 허용하고 도시의 소상공업을 되살렸으며, 1961년 청평 경제는 기저효과에 힘입어 두 자릿수 성장으로 돌아섰다. 쩐 득 하이는 내부 회의에서 대약진을 "하늘이 만든 재난이 아니라 사람이 만든 재난"이라고 규정했다.

이 시기 청평 정치에서 다른 공산국가에서 볼 수 없는 역할을 한 것이 황실이었다. 상징에 불과하던 중흥제는 1960년 겨울부터 기근 지역을 순방하며 구휼을 호소했고, 황실의 창고를 열어 곡물을 나누었다. 궁정 규모의 곡물은 기근을 해결하기에 턱없이 적었지만, 황제가 굶주린 마을을 찾아가 농민과 함께 죽을 먹는 모습은 당의 선전보다 훨씬 큰 반향을 일으켰다. 쩐 득 하이는 황제의 순방에 동행해 개혁 정책을 황제의 뜻과 연결했고, 이를 통해 당 안팎의 지지를 모았다. 대약진의 실패가 식민지 이전 황조의 권위를 되살리는 결과를 낳은 셈이다.

려우 즈카이의 권위는 크게 손상되었다. 1962년 전국 당대회에서 그는 대약진의 책임을 추궁받고 자아비판을 강요당했다. 쩐 득 하이가 려우의 면전에서 "역사는 굶어 죽은 사람들을 기록할 것"이라 말했다는 일화도 전한다. 려우는 황제와 개혁파를 혁명을 배신한 '주자파'로 의심했고, 지식인들에 대한 불만을 키운 끝에 1966년 문화대혁명을 일으켰다. 쩐 득 하이는 문화대혁명 때 숙청되어 1968년 숨졌다.

핵 개발의 꿈도 좌절되었다. 청평은 사비에트의 기술 이전이 끊긴 뒤 독자적으로 핵과 미사일 개발을 시도했으나, 대기근으로 재정이 바닥나고 문화대혁명으로 과학자들이 숙청되면서 계획은 흐지부지되었다. 곡물을 팔아 핵무기를 사려던 계획은 수백만 명의 목숨만 치르고 아무것도 남기지 못했다. 청평은 오늘날까지 핵무기를 보유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기근이 진정된 뒤에도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은 없었다. 1970년 려우 즈카이가 사망할 때까지 청평은 식량 부족을 겨우 넘겨 가며 버텼고, 식량 배급제는 1960년대 이후에도 엄격하게 유지되었다. 배급표를 잃어버리면 그달의 식량은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기에, 남에게 밥을 빌리거나 간부에게 아첨하는 일이 흔했다. 배급제는 1978년 정돈 회의 이후 점차 축소되어 1990년대 초에야 완전히 폐지되었다. 1980년대 개혁 개방과 함께 식량 부족은 사라졌지만, 식민지와 혁명 정부 아래에서 두 번 기근을 겪은 노년층에게는 음식을 남기지 않고 곡식을 쌓아 두는 생존주의적 습관이 지금도 남아 있다.

대약진 직전까지만 해도 청평은 "북산을 당장 따라잡겠다"고 호언장담했으나, 대약진과 문화대혁명을 거치며 1인당 소득에서 북산과의 격차는 오히려 크게 벌어졌다. 청평이 경제 규모에서 북산을 확실히 앞지른 것은 30여 년이 지난 1990년대의 일이었다.

비슷한 시기 사비에트도 무리한 처녀지 개간 운동으로 농업에 큰 타격을 입었고, 이는 인터루쇼프의 입지를 약화시켰다. 그러나 사비에트는 청평과 달리 실패를 받아들여 해외에서 대규모로 곡물을 수입했기 때문에 대기근은 피했다. 이 차이로 1960~1970년대 사비에트 도시에는 텔레비전과 세탁기가 보급되었지만, 청평에서는 1980년대까지 자전거와 재봉틀이 최고의 혼수품이었다. 이 격차 때문에 국경을 넘어 사비에트로 망명하는 청평인도 적지 않았다.
[1] 당시 랜드해협의 경제 규모는 루이나가 1위, 사비에트가 2위, 플로렌시아가 3위였다. 다만 플로렌시아도 제2차 세계대전의 전후 복구가 끝나지 않아, 1954년에야 배급제를 폐지할 만큼 넉넉하지 않은 시기였다.[2] 청평에서는 '청사합작'이라고도 부른다.[3] 이 발언을 북산의 식민지 제철소를 비웃은 말로 보는 해석과, 믿기 어려운 보고 수치에 대한 불안을 드러낸 말로 보는 해석이 엇갈린다.